회계사 시험을 포기했다

취업하기 어렵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우리 문송이들은 취업하기가 어렵다는 걸 느낀다. 나 같은 상경계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비상경계는 경영학을 복수전공 하려고 발버둥이다.

젊은 대학생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 차있다. 유퀴즈를 보는데 취준생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둡다.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이 뚝뚝 묻어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토익, 오픽 그리고 컴활을 딴다. 조금 더 욕심을 내면 CFA 같은 자격증을 준비한다. 회사에 뽑히기 위해서는 우리를 증명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가장 명확한 증명은 숫자와 기록으로 남는 것들이다. 

 

XX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학점은 4.0이고 Excel을 잘 다룰 줄 안다. 마케팅 공모전에 참가해서 수상했다.

 

뭐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일단 우리는 스펙을 쌓고 본다.

 

일석이조는 없다
며칠 전 AICPA(미국 회계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알아봤다. 한국 회계사보다 따기는 쉽고 마침 경영학과고 투자도 좋아하니까 일석이조가 아닌가? 그렇게 온종일 인터넷 검색하며 알아봤다. 밤에 산책을 나섰다. 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지? 난 좋아하는 게 있는데.. 그걸 포기하면서까지 AICPA를 따야 할까?

 

나는 투자와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생각하고 느낀 것을 기록하는 것도 좋아한다. 이것들은 AICPA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AIPCA를 공부하면 투자에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다른 공부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쉽게 말해 투자자와 회계사는 아예 다르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날 산책하면서 AICPA를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접었다. 이 소금팍팍 웹사이트를 성장시키는 일도 재밌고, 읽고 싶은 책도 많다. 좋아하는 일이 이미 있는데도 그닥하고 싶지도 않은 자격증을 공부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느껴졌다.



공짜 점심도 없다
작년에 제일 잘한 선택은 CFA를 준비하지 않은 것이다. 2019 여름방학 때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지원한 인턴십도 다 떨어지고 CFA 자격증을 따려 했다. 기업가치평가를 공부하고 싶어져서 CFA를 포기했다. 교보문고에서 맥킨지 <기업가치평가>를 사서 집에서 끄적였다. 어려워서 쉬어갈 때도 있었다. 그땐 워런 버핏, 피터 린치 등 책을 보며 공부했다. 주위 사람들은 ‘곧 있으면 취업인데 아무도 안 알아주는 책이나 읽고 있으면 어떻게 너 자신을 증명하느냐’고 했다. 차라리 자격증 하나라도 따라고 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겠어”라며 나는 가치평가 공부를 했다.

내 최고의 선택이었다. 투자 공부하면서 엄청나게 재밌는 분야라고 느꼈다. 그래서 책도 반 년 동안 50권 가까이 읽고 유튜브 <신과 함께>와 같은 영상도 찾아봤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재밌어서 했다. 삶의 활력소이자 취미 생활이었다. 이 분야에서 꼭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CFA를 공부했다면 절대로 지금의 결과는 없었다. 힘들고 고된 수험기간 때문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 했을 거다. 취미처럼 자유롭게 공부한 덕에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책을 보고 샤워하면서 책에서 읽은 이해 안 가는 내용을 곱씹을 수 있었다. 정리한 내용을 글로 쓸 수 있었다. 자유롭게 공부했고 내 길을 찾게 되었다. 비록 남이 보기엔 큰 발전이 없었을지언정 좋아하는 분야를 찾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루하루의 삶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무언가를 만나게 된 것은 드문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행복한 일이고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시간이었다. 약간의 용기를 낸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언제서부터인가 정말 싫어하는 말이 있다.

 

없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있는 것이 낫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 위의 말은 그 당연한 진리를 놓친다. 내가 자격증을 따려면 글을 쓸 시간, 책 읽을 시간, 리포트를 작성할 시간이 아예 없어진다. 우리가 스펙을 쌓는 동안은 내면이 소리치는 것을 못 본 체한다. 언젠가는 내면이 더 이상 소리치지 않는다.

별거 아닌 스펙 하나 따기 위해 우리는 제일 중요할 수도 있는 일을 포기한다. 사실 스펙을 쌓는다는 것은 우리가 실력을 기르기 위한 노력도 아니다. 남들도 하니까 따라하는 수동적 회피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생각한다. 

 

Connecting the dots
나는 성인으로서 미래의 나의 모습에 대한 책임이 있다. 마음에 드는 나 자신이길 바란다. 언제까지나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고, 취업을 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결혼하기 위해 소개팅에 나서는 삶을 살 수는 없다. 항상 준비만 하다 끝나는 인생을 살기 싫다. 인생은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해서 사는 따위의 것이 아니다. 20년이 넘게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 내 욕망에 솔직해지려 한다. 한 번의 시도에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는 없을지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고 좋아해야 한다. 내면의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내 마음이 이끄는 삶을 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자주 흔들린다.

“이대로 괜찮을 걸까? 남들은 달려나가는데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괜찮을 걸까?”

불안함을 떨치는 건 언제나 어렵다. 작년이었다면 이런 생각이 들면 보름을 전전긍긍했을 거다. 그래도 지금은 반나절 만에 정신 차린다. 금방 나의 일상에 다시 몰입할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 AICPA를 딸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듬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엔 회계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시작할 것이다. 현재는 날 더 뾰족하게 만들고 싶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인스타그램 창업자 케빈 시스트롬의 말처럼 점이 이어져서 선을 이룰 것이다. Connecting the dots. 겁먹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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